올해 개통 15
0주년을 맞는 링슈트라세(Ringstrasse). 이 순환도로 위를 조용히 미끄러지듯 달리는 전차에 올라탔다. 차창에 오페라극장, 미술 아카데미, 미술사 박물관, 자연사 박물관, 의사당, 궁정극장, 시청, 빈 국립대학 등 많은 우아한 공공 건축물을 비롯해 건물과 건물 사이에 조성된 아름다운 정원과 숲이 주마등처럼 펼쳐진다.
의사당 앞을 장식하는 신고전주의 양식의 조각상 사이로 본 링슈트라세. 그 너머 빈의 중심이 보인다.
빈은 쾌적하고 품위 있는 도시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도시는 막강한 합스부르크 왕가의 궁전이 있는 제국의 수도였으니 말이다.
이러한 화려한 역사적 배경을 지닌 빈이 가진 물리적인 특징 중 하나는 널찍하고 멋진 대로가 빈의 핵심지역을 둘러싸고 있다는 것이다.
이 도로는 ‘링슈트라세’, 즉 ‘순환도로’로 간단히 링(Ring)이라고도 한다.
이 도로의 폭은 57미터, 총 길이는 4킬로미터가 되는데 이토록 품위 있는 도심의 도로가 있는 도시가 지구상에서 몇 개나 있을까 궁금해진다. 차창으로 펼쳐지는 거리풍경을 지켜보고 있는데 왈츠의 왕 요한 슈트라우스 2세가 작곡한 <데몰리어 폴카(Demolier Polka)>의 선율이 문득 머리에 스쳐 흐른다.
‘데몰리어’는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철거하는 사람(들)’이란 뜻이니 곡명치고는 다소 엉뚱하다. 그런데 ‘철거하는 사람들’이라니? 도대체 무엇을 철거하는 것일까? 오늘날 유럽 여러 곳에 남아있는 중세의 성곽도시들처럼 빈도 중세에는 도시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였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 도시성벽은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더욱 더 굳건하게 보강되었는데 가장 위협적이었던 외적은 오스만 튀르크였다.
오스만 튀르크는 헝가리를 비롯한 동부유럽을 손아귀에 넣은 다음 오스트리아 본토로 침공해 1529년과 1683년에는 빈을 오랜 기간 동안 포위했다. 당시 빈은 풍전등화 같던 운명에 처해 있었지만 이 굳건한 도시성벽 덕택에 그래도 안전했다. 하지만 19세기에 들어서 전투의 양상이 바뀌는 바람에 도시성벽은 별 의미가 없어지게 되었다.
링슈트라세에 세워진 고대 그리스 신전을 연상하게 하는 신고전주의 양식의 의사당.
즉 나폴레옹의 군대가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1805년에는 아우스테를리츠에서 1809년에는 발그람에서 전투를 벌였는데 이는 도시를 포위해 시간을 끄는 지구전이 아니라 아예 들판에서 한 판 붙어 승부를 빨리 가리는 전투였던 것이다. 오스트리아를 정벌했던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난 다음 1815년 이후부터 오스트리아는 다시 옛날처럼 보수왕정체제로 돌아갔다. 하지만 나폴레옹 등장 이후 전 유럽에 뿌려진 자유사상은 마침내 1848년에 시민혁명으로 이어져 유럽 곳곳에서 소요사태가 벌어졌다.
바로 이 해에 오스트리아 제국의 신임 황제로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즉위했는데 그가 바로 빈의 도시풍경을 완전히 바꾸게 한 장본인이다. 그는 빈을 새롭게 개조하기 위해 1857년 11월 20일에 기존의 도시성벽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대로를 만드는 대대적인 도시계획안에 서명했다.
르네상스 풍을 되살려 세운 오페라 극장.
한편 그가 이 계획을 승인한 것은 도시성벽이 있는 자리에 대로가 뚫려 있으면 시민폭동을 진압하기가 쉽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사실 그는 1848년에 있었던 시민폭동을 진압할 때 도시성벽이 방해가 되었던 점도 인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링슈트라세가 있으면 도시가 더 정돈될 뿐 아니라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광이 더욱 더 빛을 보리라고 믿었던 것이다. 링슈트라세 건설 계획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회의적이었고 또 많은 사람들이 노골적으로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몇 백 년 동안 빈을 지켜온 도시성벽은 철거되기 시작했는데 이 철거작업에 동원된 인부들을 ‘데몰리어'(Demolier)라고 불렀다.
이들은 보헤미아, 슬로베니아, 헝가리 등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의 일원을 이루던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성벽철거 당시 상황을 음악으로 증언하듯 1862년에 <데몰리어 폴카>를 작곡했다.
인도에 세워진 자전거와 전차가 미끄러지듯 다니는 링슈트라세.
도시성벽이 완전히 철거되고 1865년에 마침내 링슈트라세가 모습을 드러내자 빈 시민들은 열광했다. 도로 개통식에는 대대적인 축제가 벌어졌으며 시민들은 제국 군악대가 연주하는 <데몰리어 폴카>의 경쾌한 선율에 맞추어 흥겹게 춤을 추었다.
◆ 정태남 건축사
이탈리아 건축사이며 범건축(BAUM architects)의 파트너이다. 건축 분야 외에도 음악, 미술, 언어, 역사 등 여러 분야에 박식하고, 유럽과 국내를 오가며 강연과 저술 활동도 하고 있다. <매력과 마력의 도시 로마 산책>, <로마역사의 길을 걷다>, <유럽에서 클래식을 만나다>, <이탈리아 도시기행> 외에도 여러 저서를 펴냈으며, 이탈리아 대통령으로부터 기사훈장을 받았다.
2015.03.26 정태남 건축사